책을 읽고2012.11.22 22:13

이토 준지. 아는 사람은 안다. 기기묘묘한 공포 만화를 그려 ‘이토 준지=공포 만화’란 등식이 성립한다. ‘토미에’, ‘소용돌이’ 등 수십여 권의 이토 준지 시리즈가 있다. 그림체도 괴기스럽다. 그런 그가 외교.정치를 아우르는 시사물을 신작으로 선택했다.

 

 

‘우국(憂國)의 라스푸틴’.

 

라스푸틴은 1900년대 초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괴승이라고 한다. 당시로썬 일종의 심령술사가 아니었나 싶다. 여튼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받으며 전횡을 일삼다 살해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난봉꾼이기도 했다. 30㎝ 발기 땐 50㎝에 달하는 성기가 아직도 박물관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에 사진이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늘 장담할 수 없다. 그 후 공산당이 집권했다. 필연적으로 마지막 황제 밑에서 전권을 휘두른 사람은 ‘악당’이어야 했다.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라스푸틴'이라니. 알려진 것과 달리 라스푸틴이 사실 부패한 세력을 청산하려던 개혁가란 소리인가? 러시아 역사를 깊게 모르니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아이러니한 제목처럼 만화의 주제는 대중에게는 악당이나 신념 있게 나라를 위한 한 정치인을 둘러싼 이야기다.

 

실화, 그것도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이야기다. 일본 외교관이자 러시아 전문가 사토 마사루가 원저자다. 2002년 체포 후 집행유예를 받고 공직에서 물러나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꽤 많은 책을 썼다. 자신이 정치적 배경에 의해 체포됐으며, 이 와중에 검찰, 언론이 저자를 궁지로 몰아간다는 자서적적인 책이 인기였던 모양이다. ‘우국의 라스푸틴’은 이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몬스터’ ‘20세기 소년’의 스토리 작가 나가사키 다카시가 각색하고, 이토 준지가 그렸다.

 

일본 외교관의 러시아 전문가 유우키 마모루가 전 언론으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체포된다. 배임, 위계업무방해 등 각종 혐의를 받고 검찰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수사, 사실은 츠즈키 미네오란 거물 의원을 잡아넣기 위해 측근을 몽땅 터는 국책수사다. 노무현 때와 비슷하다. 홋카이도 출신인 미네오 의원은 2차 대전 이후 러시아 영토가 된 쿠릴 열도 4개 섬(일본 식으론 북방영토) 반환을 숙원으로 여겼기에 ‘러시아 통’인 주인공을 신임했고 검찰은 미네오의 심복 격인 주인공을 ‘조져서’ 미네오를 ‘털려는’ 작전을 짠다.

 

 

외교나 정치, 검찰이란 족속이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히 만화체 때문일까. 괴기스럽다. 음흉하다. 한국과 생리는 비슷해 보인다. 우리나라 검찰도 국책수사 하지 않는가. 검찰이 소환하면, 언론이 보도하면 그걸로 당사자는 사실상 범죄자가 된다. 검찰은 혐의 사실을 언론에 흘리는 여론 재판도 진행한다. 법원 판결이 날 때쯤 사람들은 모두 잊는다. 이 만화에선 ‘검찰 리크’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만화 전반에 걸쳐 황정민.류승범 주연의 영화 ‘부당거래’도 연상된다. 경찰은 ‘가짜 범인’을 쓰는 기획수사, 검사와 기자는 접대 받고 배신 때리는 비겁자, 그 와중에 검경은 서로 헐뜯는다. 지금 현재의 모습 그대로다. 비리 검사를 검사 조직 내에서 수사하고, 초짜 검사가 병신 같이 피의자와 성관계를 맺는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소수일 것이다. 대부분은 좋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가 물을 흐린다. 아주 많이.

 

 

검사가 주인공을 심문하는 긴장 구도가 볼 만하다. 검사는 주인공에 잔뜩 겁을 주다가도 윗선의 죄만 인정하면 집행유예 정도로 풀어주겠다고 한다. 또 검사는 이를 거부한 주인공의 주위 사람을 하나하나 굴복시킴으로써 궁지로 몬다. 채찍과 당근. 언론에서 미네오 의원은 탐욕스런 구악 정치인, 주인공은 그를 추종하는 비리 외교관이 된다.

 

주인공도 반격에 나선다. 프로 정보꾼 다운 방식으로. 대외비 업무를 많이 취급했던 본인이 제대로 입을 열면 미네오 의원 뿐 아니라 역대 총리가 모두 다친다는 거다. 한 명 족치려는 검철 조직으로썬 일이 그렇게 커지는 걸 원치 않는다. 요컨대 주인공은 ‘같이 죽자’는 거다.

 

다른 재미난 요소도 많다. 주인공이 외무고시 출신이 아닌 외교관으로써 받는 차별, 외교계의 온갖 관행들도 소개된다. 실제 인물이니만큼 생생하다. 1990년대 말 개혁개방 시대 때의 러시아 정치사 뒷얘기도 재밌다. 주인공이 외교관, 즉 ‘프로 정보꾼’으로써 활동하는 모습은 꽤나 멋있다. 기자도 결국 ‘프로 정보꾼’인 만큼 배울 점이 있다.

 

 

한국인으로써 불편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일본과 독도를 놓고 대립하는 한국 입장에서 러시아 쿠릴 열도를 자신의 ‘북방 영토’라고 가져오려는 걸 좋게 볼 수 없다. 저자 자체가 철저히 자국 이익을 챙기는 우파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깊게 생각할 필요까진 없을 듯 하다. ‘국익을 생각하는 지식인/지도층은 어떤 사람인가’란 점에선 교훈이 있다. 만화 속 인물들은 북방 영토를 가져오기 위해 러시아에 어떤 실익을 주느냐를 놓고 고민한다. 당위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해관계에 따른 전략으로 본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어떤 이해관계가 있었을까. 엄연한 우리 영토, 독도가 자꾸 전 세계적으로 분쟁구역이란 인식을 주고 있다. 외교적 실책이다.

 

시사만화라도 어디까지나 만화다. 재밌다. 이토 준지의 공포물을 좋아했던 사람, 정치.외교에 둔감한 사람도 재밌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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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