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2012.10.19 05:58

-박정희 패러다임. 황병태 지음. 2011년. 조선뉴스프레스

 

기대감은 없었다. 뻔한 제목인데다 '정치인 출신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쓴 책'이란 퀴퀴한 느낌이었다. 지은이 황병태는 박통 시절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격)에서 공직 생활을 하다가, 박통 서거 후 미국서 박사 학위를 땄고, 이후 주중 대사, 국회의원을 지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화려한 경력 치고 좋은 책 쓰는 거 거의 못 봤다. 솔직히 정치인의 박정희 찬양이겠거니 했다. 책 자체도 거저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재밌었다. 박정희 찬양인 건 맞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박통의 찬양자로서가 아니라, 철저히 경제적인 데 의미를 부여했다. 정치적인 의미를 철저히 배제했다. 또 관념적으로 '이거 잘했다 저거 잘했다'가 아니라 그 시절 박통의 경제 정책의 속사정을 있는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서 한 편의 기업경영 소설을 읽는 느낌도 줬다.

 

이야기는 경제기획원 과장이던 지은이 황병태가, 박정희와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30대 어린 나이에 파격적으로 대통령과 직대했을 뿐 아니라, 장기영 당시 부총리, 이후락 비서실장도 놀랐을 정도의 신뢰를 받게 된다. 직급을 뛰어넘어 실무자와 자유롭게 접촉하던 박통이 당시 1~4차 경제개발 계획에 가장 필요했던 외국 자본 유치의 실무를 맡던 황 과장의 리포트를 인상 깊게 본 덕분이다. 본인 스스로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에 자화자찬의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이후 황 과장은 박 대통령이 현안을 직접 묻고, 직보하는 관료가 됐다. 외자유치 업무에 있어선 사실상 전권을 쥐게 됐다. 평시에서의 일개 공무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군사정권, 즉 '전시'이기에 가능했다.

 

사실 1960년대 당시 상황은 '전시'나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빈국. 동남아, 아프리카는 물론 북한보다 더 못 살았다니.. 1980년생인 나로썬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뭘 하려 해도 돈이 없었다.

 

근현대사. 특히 근현대 경제사. '한강의 기적'.. 상식 선에선 알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냉전시대를 맞으며 미국이 서독과 한국(남한)에 대규모 경기부양 정책을 펼쳤고, 그 덕에 우리가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속도에 세계가 놀랐다. 한 외신은 '한강의 기적'이라 표현했다. 거기까지는 '팩트'다.

 

하지만 실무자의 생생한 경험담은 또 새로웠다. 미국은 우리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3년 전쟁 상흔으로 농업경제도 무너진 마당에 공업 중심 정책을 펴겠다니.. 수요도 없는 배를 만들겠다고 하고(조선업), 차도 없는데 길을 놓겠다고 하고(경부고속도로), 고철도 없는데 쇳물을 만들겠다고 했다(포항제철, 현 포스코). 무엇보다 그걸 할 돈도 없는데, 잘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걸 할 테니 돈을 빌려달란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국내 여론마저 회의적이었다.

 

외자업무 최일선에 선 황병태 씨는 그 무모한 도전 최일선에 섰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유명한 일화 봉이 정선달, 그리스 선박왕을 찾아가 '이 허허벌판(울산)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거니까, 그 배를 사 달라'고 했듯, 돈을 빌려달라 했다. 박정희는 일개 과장에 '대통령 특사' 작위를 붙여 해외 곳곳에 출장을 보냈다. 돈을 빌릴 때까진 오지 말라고도 했다.

 

황 씨의 직접 소관이 아니었던 만큼 직접 연관은 없지만, 일본에서의 차관 얘기도 잠시 언급한다. 수 년 전 김종필 전 총리가 일본과의 과거사를 해소하는 조건으로 대규모 차관을 들여온 게, 현재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하지만 그 돈은 현재 '세계 톱5'의 철강사 포스코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쓰였고, 이는 다시 한국이 현재의 산업·수출 강국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다. 일본 덕이라고 할 순 없지만, '굴욕'이라고만 하기에 그 돈은 너무 유용하게 쓰였다.

 

경제지 산업부 기자로서, 여러 CEO들의 뒷얘기도 재밌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시대였던 만큼, 외자업무를 맡던 황병태 씨는 CEO들과의 접점도 많았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서운해 했던 얘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세영 현대산업개발그룹 명예회장, 한국화학(현 한화, 회장 김승연), '철강왕'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등의 사업 개시에 얽힌 일화가 소개된다.

 

왜 이런 재밌는 얘기에 '패러다임'이란 재미없는 제목을 붙였을까. 박정희식 경제발전이 결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으나 결국 성공했다는 걸 경제학적으로 이론화하기 위해서다. 사실 자유주의나 공산주의 모두 농업 같은 1차산업의 발전이 산업 발전, 근대화 국가 건설의 첫 단추라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농업 경제의 '희생'을 무릅쓰고 곧바로 산업화, 공업화에 나섰다. 국내외에서 무모한 도전이라고 비난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독재자'였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민주주의를 늦춰가며 '잘 먹고 잘 살기'에 올인한 것이다.

 

박정희 때문일까. 최근 경제학에선 부정부패 없는 건전한 독재자가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진입하는 최선이라고 하는 학설도 나왔다고 들었다. 실제 대부분 사례가 그렇다. 유럽 대부분의 산업화는 왕정 때, 동양에서 '수탈'한 막대한 자금을 기반으로 이뤄졌다. 민주화가 이뤄진 건 그 이후다. 비교적 빨리 성장한 미국이나 일본 역시 민주정부의 탈을 쓰되 독점적인 귀족 세력을 기반으로 커 왔다. 현재의 중국? 더 말할 나위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로서 얼마든지 개인적인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실제 많은 아프리카와 동남아 국가가 동일한 수준의 원조를 받았음에도 독재자와 그 주변의 부정부패로 인해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박정희식 경제 모델이, 독재였기에 성공했고, 거기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 사리사욕에 없었던 덕분이란 건 부인할 수 없다. 만일 쿠테타 없이 부정부패한 권력 집단이던 당시 국회의원이 우왕좌왕 했다면, 우린 아직 동남아의 한 국가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박정희 시대를 독재였다고 무조건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박정희 덕분에 먹고 살 만해 지니까, 그나마 목에 힘주어 비난할 수 있게 됐다는 건 역사 속에서 늘 발생하는 흔한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위기에만 뭉친다.

 

물론 저자가 마지막에 말하듯 '박정희가 민주화의 문을 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는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했을지 모르나 박 정권 말기, 주변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무소불위의 차지철 경호실장을 기억하면 쉽다. 다만 박정희 시대가 갔고,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총탄은 그 시대의 종식을 확인시켜 줬을 뿐이란 게 역사가를 꿈꾸는 내 시각이다. 86 민주화 항쟁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것 없다. 시대의 수순이었고, 우리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 그런대로 잘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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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대선을 앞두고 있고, 개중 유력 후보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인 만큼 책 외의 얘기를 덧붙이고 싶다. 기본적으로 온건한 진보 성향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이번에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박근혜에게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독재에 대해 사과하라'고 하는 건 민주적이라기보단 파쇼적이라고 느껴진다.

 

역시 박정희 정권을 친일, 친미로 매도하는 것도 유익하지 않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종북으로 몰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처구니가 없는 얘기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 양비론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이거냐 저거냐 딱 집어서 흑백논리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정치에 절대선,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근혜 후보가 양 극단의 평가가 공존하는 박정희의 딸이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역사적 해석에 따라 박근혜 후보의 지지 여부가 갈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미래다. 세세한 공약따위 볼 필요 없다. 지금 당신이 복지국가 건설에 있어 속도를 늦추고 싶다면 박근혜를, 좀 더 빨리하고 싶다면 문재인 혹은 안철수를 찍으면 그만이다.

 

내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이제 성장 면에선 충분히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고, 복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차피 복지를 할 거면 그 전문가인 진보에 이를 맡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성장은 이명박 현 대통령까지로 충분하다. 후보는 박근혜, 정당은 새누리당으로 다 바뀌었지만, 어차피 MB 정부, 한나라당의 연장선상이 현 정권에 내 5년을 더 맡기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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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형욱